‘다함께 태극기’를 들어보셨나요? 40대 주부 서영란 씨가 개발한 ‘부착식 태극기’입니다. 태극기를 게양대에 꽂는 게 아니라 창문에 붙일 수 있다고 합니다. 국경일에 태극기 다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 씨는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손수 태극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만든 태극기입니다.
국가등록문화재 '남상락 자수 태극기'[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마침 3·1절을 앞두고 전해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태극기는 애국심의 발로입니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나요?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105주년 3·1절에 태극기를 다셨나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태극기를 안 단 분도 있군요. 혹시 태극기 다는 게 불편해서 그랬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국경일엔 ‘다함께 태극기’를 붙여보시길 바랍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한·중·일 세 나라의 국기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세상의 ‘국기’가 태어난 건 국민국가의 탄생과 함께입니다. 최초의 국민국가를 탄생시킨 나라는 프랑스입니다. 우리는 프랑스보다 약 100년 늦게 국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처음입니다. 조약을 총괄하던 미국 로버트 슈펄트 전권대사는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제정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는 자기 나라 국기인 청룡기 게양을 권했습니다. 만일 청룡기를 썼다면 세계만방에 청나라의 속국임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겠죠. 우리 조상의 지혜가 발휘됐습니다. 역관 이응준 등이 미국 함정 스와트라 선상에서 ‘즉석 국기’를 제작했습니다. 이 태극기는 세계의 국기를 모아 게재한 미국 해군 잡지인 ‘해상국가들의 깃발들’에 ‘Corea Ensign’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됐습니다. 1882년 7월 일입니다. 이런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6년 앞선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 때 일입니다. 조약 체결을 위한 준비 회의 중에 일본이 “조선은 국기가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역관 오경석이 “유수영의 정문에 그려진 태극 문양을 우리 국기”라고 말했습니다. 태극 문양이 우리의 상징이 된 사연입니다. 국기의 필요성을 깨달은 오경석은 역관인 김경수 등과 상의해서 태극 문양의 주변에 사괘를 배치한 국기를 디자인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9월 일본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에게 고종의 어명이 떨어집니다. “국기 제작해라”라는 명령이었죠. 이미 오경식의 모델이 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태극 문양과 4괘로 디자인한 국기를 만듭니다. 일본 고베에 도착한 박영효는 이 태극기를 숙소에 내겁니다.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일본에 당당히 외친 것입니다. 고종은 이듬해 1883년 3월 6일 국기 제정을 공포합니다. 당시 중국 관료 마건충 등은 청룡기를 본뜬 삼각형 국기를 만들라고 강요했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얘기가 박영효의 일기, 《사화기략》에 나옵니다.
박영효의 최초 대극기 하지만 고종은 구체적으로 만드는 국기 제작 방법을 적시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태극기가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태극기 사용이 금지됐습니다. 태극기를 보유한 것만으로 처벌받았습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태극길 만들었습니다. 태극 문양의 모양도 다르고 4괘의 위치가 다른 태극기가 양산됐습니다. 독립자금 모금을 호소하는 글이 적힌 광복군 태극기, 일장기 위에 그린 진관사 태극기, 임시의정원 태극기,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태극기 등 모양이 제각각이었습니다. 특히 삼천리 금수강산에 물결치던 3·1운동 때 2,000만 백성에 들린 태극기는 모양, 크기가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태극기는 대한독립 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태극기는 자주독립의 상징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드디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가 국기로 다시 제정되고 제작법도 공시됐습니다. 태극기의 4괘, 건곤감리는 하늘, 땅, 물 그리고 불, 즉 천지 만물을 상징합니다. 태극무늬는 음양의 통합 원리와 생명의 태동을 상징합니다. 이만큼 철학적인 국기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중국 국기는 오성홍기(五星紅旗)라고 하죠. 붉은색 바탕의 깃발에 오른편 귀퉁이에 5개의 별이 있습니다. 큰 하나의 별을 네 개의 별이 둘러싼 모양이지요. 오성홍기는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신중국 건국’을 선언할 때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서 처음으로 나부꼈습니다. 이날은 오성홍기가 중국 국기로 제정된 날입니다. 하지만 ‘오성홍기’라는 이름이 붙은 건 10년 뒤의 일입니다. 1954년 중국 헌법이 공포될 때입니다. 오성홍기가 공모로 탄생한 국기라고? 오성홍기는 국민공모에서 선정된 ‘작품’이라는 걸 아십니까.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쩌둥은 새 국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해 6월 국기와 국가 휘장 도안을 위한 기구(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공모를 결정했습니다. 무려 3,012개 도안이 응모됐습니다. 그중 38개가 예심을 통과했죠. 9월 27일 준비위에서 평범한 공산당원인 쩡리안쑹(曾聯松)의 작품을 시안으로 채택했습니다. 당시 그의 작품은 지금의 오성홍기와 약간 차이가 납니다. 큰 별 안에 낫과 도끼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러시아(당시 소련) 국기를 연상시키는 낫과 도끼를 제거한 후 공식 국기로 선정했습니다.
오성홍기(五星紅旗) 붉은 바탕은 혁명을, 노란 별은 중국 민족의 인종을, 작은 별은 각각 노동자, 농민, 소자산 계급, 민족 자산 계급을, 큰 별은 중국공산당을 상징합니다. 마오쩌둥은 1949년에 쓴 〈인민민주독재를 논한다〉라는 논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독재는 전정(專政) 즉 통치를 뜻합니다. 마오쩌둥은 여기서 다섯 개의 별을 두고 “혁명과 인민의 대단결을 나타낸다”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중국인은 다섯 개의 별을 주신(救星) 이라고 부릅니다. 쥬신은 구원의 손길, 구원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오성홍기가 최초의 중국 국기는 아닙니다. 그 이전에 중국 국기가 있었습니다. 청나라 때는 삼각 형태의 노란 바탕에 하늘을 나는 푸른 용을 그린 청룡기가 있었죠. 1928년에 만들어진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도 있습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쑨원이 만들고 장제스가 채택한 국기입니다. 붉은 바탕에 왼쪽 위에 국민당기(푸른색 바탕에 흰 태양을 그린 깃발)를 넣은 것입니다. 빨강, 파랑, 흰색은 중국 근대 혁명의 기본 이념인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상징합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지금 타이베이 국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성홍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의 공통점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예. 마치 서양의 왕가의 문장처럼 왼쪽 상당에 다섯 개의 별과 12개의 햇살을 가진 흰 태양이 그려져 있죠. 이처럼 깃발 왼편 상단에 문장을 그려 넣는 것을 ‘캔톤’이라고 합니다. 캔톤 형식을 도입한 국기는 흔한 편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그리스·슬로베니아·싱가포르 등입니다. 일장기, 일본 국기가 된 지 25년인 이유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입니다. 닛쇼키 혹은 히노마루기(태양기)라고 부릅니다. 아마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국기가 법적 근거를 갖춘 것은 불과 25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1999년에 ‘국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공식 국기로 인정받았습니다. 1945년 9월 2일 제2차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 제국은 주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일장기 사용 금지됐죠. 곧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국기 사용은 허용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국기법’ 제정을 미룬 채 50여 년을 일장기를 사용해왔습니다.
히노마루기(태양기) 일장기는 하얀 바탕에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붉은색 원은 태양을 상징합니다. 태양을 그린 문양은 일본에서 고대로부터 오래도록 사용되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태양 디자인을 처음 사용한 것은 깃발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휘봉이라고 할 수 있는 군센(軍扇·가무쿠라 시대부터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이용했던 부채로 지휘봉 역할)이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개막을 알리는 겐페이 전쟁에서 붉은 비단에 노란색 혹은 금색으로 원이나 국화를 그린 깃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포상용 깃발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명예의 깃발이었습니다. 센코쿠(戰國)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깃발의 나라가 됩니다. 각 쇼군과 사무라이 가문마다 휘장과 깃발을 만들었다. 이때도 히노마루는 군대의 기장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확립한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를 묘사한 그림에 히노마루가 등장합니다. 도쿠가와는 군대 깃발만이 아니라 무역선의 깃발에도 히노마루를 사용합니다. 1868년에 등장한 메이지 정부는 히노마루를 공식적인 일본 국기로 선정합니다. 그리고 관공서에도 이 깃발을 게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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